티스토리 뷰
1. 임란전의 동아시아 정세
1) 명의 동요
건국초 : 대내외적 안정 – 대내적 :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 – 대외적 : 주변국을 조공제도에 편입 16세기 :대내외적 불안 – 대내적 : 체제적 모순과 동요 환관과 권신(동림당)의 대립으로 왕권약화 지방에서의 반란 속출 – 대외적: 北虜南倭의 성장 북방민족(달단족)의 성장과 대립 遣明船의 단절로 왜구의 침입 급증, 통제 불가능
2) 만주의 형세 15세기 초반 : 野人女眞, 建州女眞, 海西女眞으로 분열 – 명과 조선의 통제로 세력 약화 16세기 초반 : 여진세력의 성장 – 조선 : 강경책에서 회유책으로 전환 – 명 : 대외통제력이 점차 약화됨 16세기 후반 : 건주위 출신의 누루하치가 주변 부족 통합 – 1601년 해서여진 정복 – 1616년 後金 건국, 스스로 황제에 즉위 1618년 위협을 느낀 명이 후금을 정벌하려다 대패 – 조선 군대(강홍립 등 13,000명) 후금에 투항 – 광해군의 양면정책, 후금과 사신교환, 정세 관망
3) 일본의 통일 대내적 : 織田信長, 豊臣秀吉 등이 戰國時代 통일 – 1568년: 織田信長 京都 입성(1차 통일), 가신의 배신으로 죽음 – 1582~1590년 : 豊臣秀吉 통일정권 수립 대외적 : 유럽인(포르투칼 등)과의 접촉 – 총 전래 : 九州 種子島 영주가 포르투칼 상인에게서 철포 구입, 제조법 습득 ⇒전술상의 변화, 신흥무장세력 성장 – 예수교 전래 : 봉건적 유교이념과 충돌 1549년 야소회 선교사가 가고시마에 전파 1582년 구주지역 신도 12만명, 小西行長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준비 – 1582년 반대파 제거, 85년 오오사카성 축조 – 1587년 九州정벌, 사카이, 하카다, 나가사키 등 무역항을 직할 지로 복속, 군자금 확보 – 1582년부터 16년동안 추진하였던 檢地실시 – 1587년 刀狩令 실시에 따른 무장해제 – 1591년 고다와라(小田原)정벌, 전국적 호구조사 단행, 전국 통 일, 조선출병 준비 본격화
4) 조선의 정세 대내적
– 주자학의 교조화, 개국공신세력의 귀족화로 내부 모순 노출 – 지배층 내부의 분열 사화 :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붕당 : 사림의 분열 대외적 – 南倭北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 –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부족 일본의 국내정세에 대한 정보의 부족과 부정확 2세기 동안의 평화에 따른 안이한 자세 대일외교의 필요성 감소 : 소극적 외교
2. 일본의 침략
1) 초기전투의 패배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 5월 2일 小西行長, 加藤淸正, 黑田長政 등 3로로 나누어 북 상하여 서울 진격 6월 13일 평양성 함락 개전 2달만에 3도(서울 개성 평양) 함락, 함경도까지 진격 임란초기 육전에서의 참패 원인 – 일본군에 대한 정보부족과 전쟁준비 부족 – 조총의 위력과 戰國時代 기간 중 잘 조직된 병력 – 군사편제상의 오류와 전술상 실수 일본군이 육전보다 수전에 능하다고 판단, 경상 전라도에 성 쌓 고 호 설치, 성을 낮게 쌓아 도움이 되지 못함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체제로 전환 국지적 일시적 침입에는 효과적이지만 대규모의 전면전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방어체제
2) 의병의 봉기 4월 22일 곽재우(경상도 의령)가 처음 거병 전라도, 충청도에서도 고경명, 김천일, 조헌 등이 거병 의병장의 신분 – 문반출신의 전직관리나 지방의 유림 – 夷敵視하던 일본 침략과 만행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 표출 초기의 의병부대 召募義兵 주축(사병 모집 엄격히 금지) 5월말 의병장 격려 의병활동 활발, 관군과 동등한 지위 – 1593년 정월 : 의병 총수 22,600여명 의병의 역할 – 적군과 교전하여 큰 타격 줌(고경명, 김천일, 조헌 등) – 적의 후방 교란, 보급로 차단하여 진군속도 늦춤 – 이반된 인심을 돌이켜 전투에 참가하게 함 – 곡창지역인 호남지방을 보호 : 중요한 전략적 의의 전쟁 장기화로 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에서 의병 활동 僧兵의 전국적 봉기
3) 수군의 승리 개전초 경상좌우수영의 군사가 패한 이후 연전연승하여 전투의 상황을 바꾸어 놓는데 결정적 역할 1차전투 : 5월 4일 – 옥포해전 : 왜선 26척 –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40여척 격파 2차전투 : 5월말 6월초 – 사천, 당포해전등에서 왜선 70여척 격파 3차전투 : 7월 8일 – 한산도해전에서 70여척, 안골포해전에서 40여척 격파. 4차전투 : 9월초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100여척 격파 조선수군의 승리 원인 – ① 수군의 편제 정연 – ② 전선, 화포 등 무기의 성능 우수(거북선은 돌격선 역할) – ③ 이순신의 전략과 지휘능력
4) 반격전과 강화회담 의병봉기와 관군의 정비로 6월부터 전투 지속 – 10월 진주성전투, 이듬해 2월 행주대첩 등 명군의 참전으로 12월 평양성 탈환 일본군이 후퇴하고, 전쟁이 교착상태 유지 명과 일본간 강화회담 진행 – 황신이 일본에 통신사행으로 가는 등 외교교섭이 진행 – 명일간의 강화회의 결렬 1597년 일본군 재침(丁酉再亂) – 일본군 총수 14만여명 – 壬亂때와는 달리 경상, 전라, 충청도를 완전점령을 한 후 북 진하는 전략 취함 – 조선의 충실한 준비로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이 후 패배하여 후퇴를 거듭 1598년 8월 豊臣秀吉이 죽자 일본군 총퇴각 – 11월 18일 이순신의 노량해전 승리로 7년간의 전쟁 종식
https://itstory07.tistory.com/1154
로마 제국 멸망론
ⅩⅢ. 로마 제국 멸망론 ⅰ. 로마제국 멸망론 개론 1. 로마 제국 멸망 논쟁의 배경 ☞4세기~5세기경의 이교도의 공격과 이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응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탄생 배
itstory07.tistory.com
3. 임진왜란의 영향
– 조선, 일본, 명을 비롯 동남아시아의 유구, 天竺, 태국 참전 : 동아시아의 전쟁
1) 조선의 영향
정치, 군사적인 면 – 備邊司의 역할 강화 : 의정부의 기능 유명무실 – 군사기구의 개편 5위⇒ 5군영 훈련도감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 명의 절강병법 에 따라 삼수병제도 도입 운영 – 지방 : 속오군 창설 – 신무기의 개발 : 비격진천뢰, 화차 등 왜 조총과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 등 소개
경제적인 면 – 토지제도와 수취제도의 변모 임란후 토지면적 1/3로 감소(170만결 ⇒ 54만결) 조세수입 감소, 농민생활 황폐 量田사업의 전국적 실시 貢物의 米納化(大同法), 量田收稅의 간편 병역의 납세화(均役法) 환곡제도의 시행 문화, 사상적인 면 – 문화재(불국사, 경복궁 등)의 소실 –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 심화 – 명에 대한 사대사상 강화(再造藩邦之恩) 德川幕府가 국교재개요청으로 국교 재개 – 조선 : 피로인의 쇄환 – 일본 : 대외적 안정, 무역상 이익의 필요성(대마도)
2) 일본의 영향 정권의 교체 – 豊臣秀吉과 西國지방의 大名 몰락, 德川家康 권력 장악 – 1600년 세키하가라전투에서 승리, 덕천막부 개설 문화재의 약탈과 문화적 성장 : ‘약탈전쟁’ – 6부 설치, 대규모로 조직적인 약탈 도서, 공예, 포로, 금속, 보물, 축부 – 도자기 : 도공 납치로 세계최대의 도자기 수출국으로 성장 심수관 : 정유재란때 남원에서 납치, 薩摩窯 이삼평 : 有田窯 – 주자학 : 조선의 유학서적과 포로를 통해 일본유학 발전 강항 :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퇴계유학을 전수 후지와라 세이카 : 德川幕府의 고문, 林羅山에게 계승 덕천막부는 주자학을 막부의 官學으로 지정 – 인쇄술 : 조선의 금속활자 20여만자 약탈 일본 인쇄문화와 도서문화 발달 토대
3) 중국의 영향 막대한 군사비용 지출로 재정 악화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여진족 통합 강력한 국가로 성장 후금의 후신인 淸에게 멸망
4. 임진왜란의 제문제
1) 용어문제 한국 : 임진왜란, 정유재란(1597) – 조선시대 : 임진년의 왜적⇒ 임진왜란 도적떼가 침입해서 일으킨 변란, 적개심의 반영 일본군의 침입을 단순한 도적떼로 인식 – 선조실록 : 왜구가 이르렀다. – 선조수정실록: 왜구가 대거 침입하였다. 일본 : 文祿慶長의 役 – 江戶초기: 부정적 평가, ‘朝鮮役’ ‘朝鮮陳’ ‘高麗陳’ – 明治시대: ‘정의의 전쟁’ ’聖戰’ – 1910년대: 내선일체로 ‘文祿慶長의 役 ’ – 1930년대: 대동아공영권 구상, 임란 높이 평가 중국 :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 강조 – 임란 직후: ‘東援의 役’ ‘東事’ 萬曆東援의 役’ – 1970년대: ‘再造東國’(명의 역할 강조) 6,25(抗美援朝) 북한 : 임진조국전쟁
2) 임진왜란을 보는 시각 국난극복사의 시각 – 묘호의 변화 : 宣宗⇒宣祖, 멸망위기의 왕조를 구한 군주 임란 직후 의병활동을 소극적으로 평가: 선조의 통치문제 – 19세기 말: 극난극복의 사례로 임진왜란 제시 의병의 활동과 이순신의 업적이 재조명됨 전쟁사의 시각 : 승패의 유무 – 초기전투는 패배하였지만 평양성 전투 이후 승리하였다. – 침략의 목적을 달성하였는가의 여부로 판단 임란 후 사대교린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 승리 강조하면 조선이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간과 노예전쟁의 시각: 20만명?을 붙잡아가 노예화 함 문화전쟁의 시각: 도공 붙잡아가 도자문화의 발달에 기여
3) 임진왜란의 발생원인
豊臣秀吉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1960년대, 중촌 영효 등) – 豊臣秀吉이 불평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의 정 복욕을 채우기 위해 일으킴 일본의 국제무역(조선,명)에 관련된 해외발전(1980년대) –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국제무역 활발 – 조선을 장악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킴 일본의 봉건영주 특히 구주지방 大名의 세력을 약화시킬 의도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조공제도)에 대한 도전
4) 명군의 참전 문제
명의 참전의도 – 조선이 정복당하면 중국도 안전하지 못하다. – 중국 본토보다는 조선을 전쟁터로 삼는 것이 낫다. – 평지인 요동보다 산지가 많은 조선에서 전쟁 하는 것이 좋다. – 조선에서 싸우면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선에 요구할 수 있다. –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과 협상을 서두른 이유는 중 국 본토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었다고 판단했기 때문 명의 참전의 영향 – 조선 내부문제에 사사건건 개입 명군의 횡포가 극심했지만 전쟁 후에 명군의 철수를 만류 – 명군이 없이 현재 지배체제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 세자책봉, 왕위계승에 관여, 막대한 은이 명에 유입 – 모화사상의 확산 명이 조선을 지켜 준 은인이다. ⇒사대주의⇒병자호란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기존의 지배체제를 굳건히 유지
https://itstory07.tistory.com/1154
로마 제국 멸망론
ⅩⅢ. 로마 제국 멸망론 ⅰ. 로마제국 멸망론 개론 1. 로마 제국 멸망 논쟁의 배경 ☞4세기~5세기경의 이교도의 공격과 이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응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탄생 배
itstory07.tistory.com
5) 이이의 십만양병설의 진위 내용 : 이이가 1583년 4월에 왜군의 침입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기르자고 주장하였으나, 유성룡 등 대신이 평 화시에 군대를 기르는 것은 화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반대 하여 무산되었다. 이병도『조선사대관』(1948)『修補 조선사대관』(1964) 에 십만양병설 수록 근거 – 「율곡행장」(김장생:이이의 문인) 일찍이 경연에서 (율곡)이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 급한 사태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 지 않아서 장차 土崩瓦解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정승 유성룡이 “사변이 없는데도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어 경연에 참 석한 신하들은 선생(율곡)의 말이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다. 선생 이 밖에 나와 유성룡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속유들은 시무에 통달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기 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 또한 어찌 그 말을 하는 가”라고 하였다. 임란 후에 유성룡에 조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보니 이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의 말을 채용했더라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고 하였다.
– 「 栗谷諡狀」(이정구) ,「율곡신도비명」(이항복) – 「율곡연보」(송시열) 김장생의 율곡행장 이용 선조 16년(1583) 4월에 10년후 침략 예언, 10만양병설 주장 – 『선조실록』율곡의 예언이 수록되지 않음. 『선조수정실록』은「율곡연보」와 달리 15년 9월로 기록 선조 15년 9월에 이이가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 여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자 유성룡이 “군 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여 강력하게 반론하였다 /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토대로 편찬된 증거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이유 – 선조실록의 객관성 문제(광해군 1- 2년 편찬) : 이항복, 기자헌(북 인)이 총재관이 되어 서인 폄하, 북인 칭송 – 선조수정실록 :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 잡고 편찬(선조 21- 효 종 8) / 친서인, 반북인, 반동인의 입장 서술 – 개인소장 史草와 비문, 행장, 잡기를 수집하여 수정
야사: 이준경(1499-1572)이 임진왜란 예언 – 동서분당이 있기 4년전인 선조 4년(1571) 붕당을 예견
6) 김성일과 황윤길의 보고 1590년 3월 통신사(황윤길, 김성일, 허성) 파견 1591년 1월 귀국, 일본의 국내정세 및 풍신수길의 인물상 보고 – 황윤길 :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 을 것이며, 풍신수길은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 – 김성일 :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며, 풍신수 길은 “눈이 쥐와 같아서 두려울 것이 없다” – 김성일의 주장에 따라 방비를 서두르는 것 중단 김성일이 황윤길과 다르게 보고 한 이유 – 동서붕당의 원인, 민심 흉흉할 것을 우려 김성일 – 임란 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서울로 소환 중 柳成龍 등의 상소 로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 –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 모집,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 켜 전투력 강화에 노력 – 8월 경상좌도, 우도관찰사로 의병규합, 군량미확보에 주력 – 진주목사 김시민, 의병장들과 협력, 진주성 보전 – 1593년 도내 각 고을에게 왜군에 대한 항전 독려하다 병사
7) 이순신의 죽음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 ① 자살설 – 숙종대 이민서(1633~1688) 처음 제기 “김덕령이 죽고 난 후 여러 장수들이 스스로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곽재우는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고 산속에 숨 어 죽음을 면하였으며, 이순신도 전쟁 중에 갑옷을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호남과 영남 등지 에서는 부자 형제들이 서로 의병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민서는 이순신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음( 35년 후 출생) 무고하게 김덕령을 죽인 선조의 행위 비난하기 위해 자살설 제기 – 군사적 입장: 총사령관이 갑옷도 입지 않고 갑판 위에서 지휘 를 한 것은 자살행위다 ② 은둔설 - 자살한 것이 아니라 모처에 숨어 은둔하였다. – 19일 새벽, 공이 한참 독전을 하다가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장남 회와 조카 완, 종 金伊 3인만 죽은 사실을 알았 다.(이분의 행장) – 총을 맞고 바로 죽었다는 사실에 의문제기 총사령관 주위에 부하들이 없었다. 아들 회, 조카 완 등이 함대를 지휘했는데도 알지 못했다. – 실제 함대를 지휘한 자는 송희립 등 이순신의 측근 장수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장수가 총을 맞을 수 있겠는가. – 전라우수영 기록 : 대장선 90명, 이순신의 배 60명 군사 배치 두 설은 선조가 전쟁영웅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그들을 견제 하고 제거한 사실을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에 불과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선조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失政)을 고려하여 전쟁영웅인 의병장 제거 : 이순신, 김덕령 제거, 곽 재우 생존 임란 이후의 논공행상 – 호성공신: 임금을 뒤따른 문신 86명 – 선무공신: 무공을 세운 무신 18명 1등 이순신, 권률, 원균 3명/ 2등 김시민 등 5명/ 3등 10명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임진왜란에 대한 선조의 평가 –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조선의 의병이나 장수가 아니라 명의 구 원병이다. 자신의 실정에 대한 변명에 급급
8) 거북선에 대한 문제 ① 이순신이 발명한 것인가. 龜船에 대한 최초의 기록, 『태종실록』 13/2 갑인 – 임진나루에서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훈련 상황을 참관. 『선조수정실록』 25/5 경신 – 이순신은 전쟁에 앞서 전투 장비를 정비하면서 자신이 거북선 을 만들었다. 『광해군일기』14/7 병신 – 1622년 비변사에서 이순신이 만든 대로 거북선을 만들 것을 주 청하자 “광해군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을 훈련시켜 변란에 대비한 것처럼 변란에 대비하기를 이 순신 같이 하라”고 명령 『인조실록』17/7 기사 – 1639년 최명길이 임금에게 “경기수사에게 거북선을 제조하여 시험해보도록 하려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만든 것입니다.”고 아 룀. 시대가 흐를수록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인식이 보편 화됨
② 거북선은 철갑선인가? 목선인가? –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경신조 “거북선은 배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 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 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그 입은 대포구멍으로 활용되었다. 뒤 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고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 이순신 행록(李芬)에 같은 내용 수록 거북선은 철갑선이다. – 언더우드(연희전문 교수) 주장 한국선박사를 쓰면서 동료교수 정인보 말을 인용 “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서술 본인은 판옥선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 – 문일평 : 철갑선이다 『征韓偉略』명치 이래 일본의 한반도 정벌기사에 근거 거북선이 철갑선이어서 일본의 화포가 해를 미칠 수 없었다 – 진단학회편, 『한국사』(근세전기), 을유문화사, 1962. 이상백: 거북선은 철갑선으로 세계의 선구가 된다
板屋船에서 유래하였다 : 언더우드 –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전선으로, 전기의 猛船에서 유래 맹선의 3종류 : 80명, 60명, 30명 승선 – 맹선과 판옥선의 차이 : 上粧의 유무 상장 :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설치한 후 기둥사이에 판자로 된 방패 부착,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 – 판옥선과 거북선의 기본구조 동일(김재근, 『조선왕조 수군 선 연구』, 일조각, 1977) 평탄한 갑판인가, 거북 등 모양의 둥근 갑판인가. 거북선의 재료 - 나무 – 『이충무공전서』 정조 19년(1795) 통제영구선(거북선)과 전라좌수영구선의 그림 수록 철이 아니라 나무를 잇대어 만든 배로 묘사 – 두꺼운 소나무 제조: 撞破法에 활용, 일본 배는 얇은 杉나무 나는 것처럼 빨랐다는 기록을 통해서 무동력선이기 때문에 가 벼운 나무 사용, 철은 불가(염기에 부식) – 槍船 : 1606년에 삼도도통사 이운룡이 거북선의 단점을 보완 하여 제조(『선조실록』39/12 무오) 거북선 단점은 승선인원이 많고 활쏘기에 불편하다. 개량거북선인 창선도 철갑선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판옥선, 거북선, 창선 모두 목선이었다.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동소수점 산술의 파이프라이닝 (0) | 2023.04.18 |
---|---|
부동소수점 곱셈 / 나눗셈 (0) | 2023.04.17 |
역사란? 한국사 (0) | 2023.04.15 |
배선기구(전멸기) (0) | 2023.04.14 |
배선기구 - 과전류보호기(자동 차단기) (0) | 2023.04.13 |